빈칸들
2019년부터 석운동은 비정기적으로 <짓기와 거주하기>라는 이름의 공간과 관련한 세미나를 운영해 왔다¹. 공간을 공부하는 세미나는 결국 공간을 이루고 채우는 사람들에 대한 공부로 이어졌다. “누가 인간인가?”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고 설계하는 공간이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하는지 질문해야만 했다. 이런 질문은 지하철 시위가 한창이던 2021년 이동권 투쟁의 풍경들과 맞물리며 장애학, 그러니까 다른 몸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만들어 온 계단들, 의자와 테이블들이 누구에게 열려 있고, 또 누구에게 닫혀 있는지를 깨닫는 순간들이었다. 우리가 ‘으레 그렇다고 생각하며 만든 것들―생각의 ‘빈칸’들―은 여지없이 르 코르뷔지에의 ‘모뒬로르’²를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순간들이 곧바로 다양한 몸들을 포함하는 작업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한정된 예산과 기한, 무엇보다 공간 혹은 프로젝트의 분명한 용도와 목적 때문이었다. 경사로를 놓기 위해 좌석 수를 줄여야 하는 상황, 동선을 확보하기 위해 미감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은 클라이언트에게나 우리에게나 달갑지 않았다.
반면 《우리의 몸에는 타인이 깃든다》는 ‘접근성 강화 주제전’이다. 전시 공간 조성은 우리가 공부한 것들을 실험할 좋은 기회인 동시에,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는 프로젝트였다.
석운동은 최소한의 배리어 프리 기준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실험하고 싶었다. 리서치 기간 중 우리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앨런 던롭이 설계한 헤이즐우드 학교였다³.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있는 이곳은 시각 및 청각 장애를 포함해 감각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교육하는 학교다. 앨런은 촉각과 청각을 활용한 공간 구성에 초점을 두었는데, 특히 우리를 매료한 것은 다양한 질감을 가진 벽면이었다. 이 학교에서 학생들은 벽을 짚고 이동하며 자신의 위치와 공간의 용도를 파악할 수 있다. 비단 시각 장애를 가진 학생만이 아니라, 이 공간을 경험하는 학생들 모두가 공간이 꼭 시각적인 방식으로만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운다.
이로부터 석운동은 전시장 벽면을 따라 설치된 몰딩과 타일을 구상했다. 허리 높이에 바니쉬로 부드럽게 마감된 네 줄의 가로 몰딩을 따라가다 보면 중간중간 세로형 몰딩이 교차하는 구간을 만난다. 세로형 몰딩을 따라 위쪽으로 손을 옮기면 촉감 타일과 점자판을 만질 수 있다. 촉감 타일에는 가까이 배치된 작품에 참여할 때 사용하는 감각 기관―눈, 입, 귀, 손, 발―을 조각으로 새기고, 그 옆에는 점자로 작품에 대한 설명을 두었다.
우리는 이 몰딩과 타일이 평평하고 하얀 벽면―화이트큐브―이라는 미술관 공간의 경계를 흐리는 동시에, 유용하고 미적인 방식으로도 작동했으면 했다. 조각, 몰딩과 같은 장식은 실내 건축에서 주로 이음새를 가리거나 구조적 결합을 위장하는 용도로 사용되어 왔다. 근대 건축이 추구해 온 ‘기능주의적 단순함’은 그러한 장식을 불필요하거나 퇴폐적인 요소로 간주하며 제거해 왔고, 그 절정에는 코르뷔지에의 ‘모뒬로르’와 같은 정제된 비례 체계가 있었다.
그러나 몰딩은 이음새를 드러내고, 단절을 감각하게 하며, 공간의 흐름 속에서 접촉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또 다른 질서로 작동할 수 있다. 이는 퀴어 미학이나 장애 미학이 말하는 ‘단일한 미감 질서’에 대한 이의 제기이기도 하다⁴. 시각적 중심성에 균열을 내는 이러한 접근은 기능성과 장식성, 미감과 실용 사이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감각의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공간 감각을 탐색한다. 덧붙여 그러한 균열이 그간 화이트큐브적 공간을 온통 빈칸이라 느꼈을 시각 장애인의 감각에 미약하게나마 도움을 주는 장치가 될 수 있다는 이중적 복선이 우리의 순진한 의도였다.
그러나 촉감 타일의 샘플을 조각하고, 몰딩을 적용한 랜더링 이미지를 만들며 우리는 무언가 찜찜했다. 눈을 감고 타일을 감각하는 것과 시각 장애를 가지고 타일을 감각하는 것은 같은 것일까? 혹시 ‘으레 그럴 것’이라는 추측들로 또 다시 빈칸을 남겨 두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안녕히 엉키기> 워크숍에서 만난 시각 장애인 당사자 준범에게 샘플로 만든 타일을 보내, 피드백을 부탁했다.
그런데 웬걸, 준범의 피드백은 너무나도 개인적이었다.
“눈이 너무 일반적이야. 검은자가 다른 쪽을 볼 수도 있잖아.”
“귀가 좀 부족해. 이어폰을 끼면 어때?”
“입을 벌리고 있으면 안 되나?”
우리가 기대하고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준범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소위 시각장애인 일반이 이를 손끝으로 감각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니, 잠깐만.
엉뚱한 듯한 준범의 피드백을 곱씹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각장애인 일반’이란 무엇인가? 혹시 ‘그들’이, 우리가 지정한 타일의 감각만을 온전히 느껴야 한다고 상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떤 눈은 감고 있고, 어떤 손은 ‘브이’ 자를 그리고, 어떤 입은 혀를 내밀 수도 있었다. 자칫 시각 장애인 일반에 혼란을 줄 수 있단 우리의 판단에 다시 질문하게 된다. 혼란은 나쁜 것인가? 감정은 개인적인 것인가? 화이트큐브의 경계를 이만큼은 흐려도 괜찮고, 여기서부턴 안된다는 또 다른 경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끝내 준범의 피드백을 적용한 웃는 눈, 이어폰을 끼고 있는 귀, 벌리고 있는 입을 조각하지는 않았다. ‘브이’ 자를 그리는 손도 없다. 질문을 너무 늦게 던졌고, 생각을 벼르고 자신 있게 제안하기에 우리의 고민이 부족했던 탓이다.
고백하자면 이 외에도 인지했지만 매끄럽게 해결하지 못한 빈칸들이 몰딩과 타일을 잇는 벽 틈틈이 존재한다. 작품을 사이에 둔 두 벽은 몰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벽 내부의 서버실을 구축하느라 만든 관계자를 위한 문에도 몰딩은 이어지지만, 문이 열리도록 하는 불가피한 각도가 있어 혼란을 줄 수 있다. 비상구로 마련된 통로 앞으로 몰딩은 이어지지 않는다. 곳곳이 여전히 애매하고, 동선이 끊기고……. 어쩌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준범의 피드백은 우리에게 다른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모든 것을 예측 가능한 것이라 착각하지 말 것. 빈칸을 남겨 둘 것. 코르뷔지에가 건축사에 길이 남을 이유는 아마도 그 모든 빈칸을 채울 열쇠를 발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정답처럼 보이는 열쇠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수많은 문제들, 그 자체로 가능성인 빈칸들에 질문하기를 주저하게 만들 만큼 강력하다.
코르뷔지에의 모뒬로르로 수렴하는 이전의 빈칸들과 이 빈칸들은 다르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으레 여겼던 빈칸들과,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선택들 속에 피할 수 없이 생겨난 빈칸들은 서로 다르다.
사려 깊은 전시의 안내자들과 창조적인 참여자들에 기대어 이 빈칸들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대한다. 아마도 참여자들은, 우리의 걱정이 무색하다는 듯 전시를 경험하고, 우리가 예상한 적도 없는 더 많은 문제들을 발견해 낼 것이다.
전시 공간이든, 상업 공간이든, 공간이 완성된 뒤에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온 적이 많다. 하지만 이번엔 오래 머물고, 다양한 방식으로 감각하는 참여자들을 관찰하고, 또 질문을 건네고 싶다.
이 경험들이 우릴 또 다른 무수한 빈칸으로 데려가 주길 기대하며.
1)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의 동명의 책으로부터 시작된 온라인 세미나로, 석운동이 진행하며 공간뿐 아니라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의 참여에 열려있다. 2019년부터 비정기적으로 약 열 권의 책을 읽었으며, 매 세미나가 끝날 때 오프라인에서 모여 공간을 견학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워크숍을 진행했다. 2024년에는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한 인문학 공간의 요청에 따라 세미나 참여자들과 함께 경사로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2) 모뒬로르(Modulor)는 르 코르뷔지에가 제안한 인체 비례 단위 체계로, 평균적인 백인 남성(키 183cm, 팔을 든 높이 226cm)을 기준으로 공간의 치수를 설계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인간 중심 설계를 표방했으나, 결과적으로 비장애인·남성·백인 중심의 표준을 보편화하면서 다양한 신체를 배제하는 기준이 되었다. 참고: 르 코르뷔지에, 『모뒬로르』, 전영택 옮김, 동녘, 2002.
3) 앨런 던롭(Alan Dunlop)은 글래스고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가로, 감각 중심의 설계 접근과 공공건축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잘 알려져 있다. Hazelwood School은 2007년 그가 설계한 감각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로, 촉각·청각 등 비시각적 감각을 활용한 공간구성으로 주목받았으며 RIBA 어워드를 수상했다.
4) 로즈마리 갈런드 톰슨, 『눈맞춤: 응시, 장애, 그리고 시각적 문화』(김성은 옮김, 문학동네, 2023). 이 책은 시선을 통해 구성되는 장애의 미학을 다루며, ‘비표준적 몸’과 그것을 둘러싼 감각적 경험이 어떻게 예술과 문화 속에서 재현되고 협상되는지를 설명한다. 특히 장애를 감각과 지각의 다양성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장식성’이 기능성과 분리되지 않는 새로운 미학적 실천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촉감바와 촉감타일의 디자인과 제작에는 디자이너 서민경, 브라운빌딩(brownbuilding.kr) 최주현의 크나큰 도움을 받았다.